재미있는 무술 이야기

수벽치기 바로알기---육태안 전인 인터뷰

떠도는 이야기에 대하여 2010/07/20 17:31 이제 보다 자세한 내용을 육태안 선생과의 인터뷰를 통해 알아보자.

질문> 수벽치기에 대한 부정적인 이야기를 접했을 때 느낌은?


▲ 다시 돌이켜 생각하기 싫은 지난 일들, 누가 물어보면 대답하기 짜증나는 그러한 일들은 그냥 과거 속에 묻어두고 싶다. 지금껏 보이지 않는 세력에 의해서 내 개인의 명예는 지속적으로 훼손되었다. 수벽의 등장을 저지하기 위해 수벽을 바로 세우고자하는 한 개인을 야비하게 공격했다. 육태안을 죽이면 수벽치기도 죽을 것이라는 그들의 작전은 실패했다. 육태안도 못 죽였고 수벽치기는 다음 세대로 이어졌다.

나 하고의 개인적인 감정이 나빠서 그런 것이라면 나를 비판하라. 수벽치기까지 한꺼번에 몰아서 매장시키려 하는 것은 큰 실수를 하는 것이다.


  
질문> 수벽치기에 대한 의혹 중 대부분은 기천과 연관된 내용이다. 아무래도
        수벽치기 이전에 깊이 수련했던 무예라 그런 것 같은데,
        현재 기천에 대한 생각은?

▲ 기천은 내가 젊은 시절 몰입하여 수련했던, 내가 좋아하고 아끼는 무술이다. 기천을 처음 만나고 난 이후 지금까지 마음 속에서 놓아본 적이 없다. 나는 지금도 기천을 아끼고 존중한다. 특히 박대양 사부와의 스승과 제자로서의 관계를 잊은 적 없고 개인적인 정은 지금까지 깊게 남아있다. 그동안 수벽의 일을 하느라 기천과 떨어져 있었다. 내가 기천에서 활동을 하지 않고 수벽의 일에만 전념하는 것을 서운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좋지 않은 말이 오간 적이 있었는데 지금은 마음에 두지 않는다.

내가 배운 내용에 대해서는... 잘 정리해서, 보태서 되돌려주고 싶다. 전통무예 기천의 존재는 우리문화의 자랑거리이며 박대양 사부에 의해 어렵게 전해진 전통무예의 중요한 맥이다. 후인들은 이 맥을 소중히 지키고 보존하면서 바르게 발전시켜야할 것이다.

  
질문> '기천의 배반자'라는 말이 있다.

▲ 요즘은 좀 잦아든 것 같기는 하지만… 자꾸 나를 배반자라고 하는데, 기천을 떠난 이후 30년이 되도록 배반자 소리를 들어야할만큼 잘못한 것이 있는지. 한 가지 명확히 해두고 싶은 것은 나는 기천으로부터 난데없이 제명을 당한 것이지 배반을 하고 떠나온 것이 아니다. 그런 상황에서, 기천 계보로 따지자면 한참 격차가 있는 새파란 사람들이 ‘왜 기천을 배반하셨습니까?’라고 말하는 것을 보고 있을 때 내 기분이 어떻겠는가? 자신이 직접 경험하지도 않은 사건에 대해서 그저 전해들은 이야기만 가지고 섣불리 판단하여 함부로 말하는 것은 삼가해야할 일이 아닌가.



질문> 기천에 있었을 당시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


▲ 그 때 나의 관심은 기천의 체계화와 대중보급이었다. 몸 기능은 그야말로 절정이었고 열정 또한 대단했다. 크게 두 가지를 고민했는데, 첫째는 산에서 가르치고 배우던 방식을 그대로 따를 수는 없으니 요즘 세상 사람들에게 맞는 단계적인 수련체계를 만들자는 것이고 둘째는 역사․계보 문제만큼은 최대한 솔직하게 가자는 것이었다. 우선 신화적이고 황당한 이야기를 없애고 설령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런 느낌을 주는 것은 삼가고 상식 범위 안에서 이해되는 연원과 계보를 정리하자는 것이었다. 박대양 사부와 의견의 일치를 보았으며 함께 사부가 수련했던 장소를 답사하기도 했다.


  
질문> 그런데 무엇 때문에 관계가 나빠지게 되었는지?


▲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답사를 다녀온 이후로 점점 사이가 멀어지기 시작한 것 같다. 답사 그 자체에 문제가 있었던 것 같지는 않고, 누군가에 의해 조작된 이야기가 퍼지면서 사이가 나빠지기 시작했다. 한번 벌어진 틈은 그 후에 이어지는 몇 가지 사소한 일로 골이 깊어졌다.


  
질문> 조작된 이야기라면 그 내용은 무엇인지?


▲ 이를테면 내가 사부의 뒷조사를 하고 다니고 있으며 사부의 약점을 잡아 기천을 장악하려 한다는 식의 내용이었다. 딱히 사부와 직접적인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고 그 주변에 있었던 사람들에 의해 생겨난 일이다. 누구도 나에게 직접적으로 무슨 말을 한 적은 없었다. 훗날 가깝게 지내던 사람들에 의해서 나에 대한 음해가 진행되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정말 씁쓸했다. 내가 기천에 끌어들였고, 내가 직접 운동을 가르쳤던 사람들이 설마 그런 일을 하리라고는 그 당시에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당시 나 또한 대인 관계에 있어서는 확실히 유연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내가 봐도 고집스럽게 갔다. 20대의 혈기 왕성한 때였고 어려운 상황에서 주변 사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전통무예만 바라보고 달려가던 시절이었다. 내가 추구하는 세계를 조금이라도 건드리면 강경일변도로 맞서던 때였다. 그런 면에서 나에 대한 안 좋은 기억이나 섭섭한 감정을 갖는 사람이 꽤 있다고 본다. 그러나 있지도 않았던 이야기를 지어내어 사람을 모함하는 것은 분명 잘못된 일이다.

    
질문> 기천에서 ‘제명’ 당한 후에는 어떤 활동을 했는지.


▲ 혼자서 전통무예에 대한 조사‧연구를 계속했다. 문파 관계를 떠나 홀로 있으니까 참 편했다. 우연한 기회로 문화‧예술계와 접촉하게 되었고 그 쪽에서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려고 하는 데 아킬레스건을 다치고 말았다. 공연 도중이었다. 요양차 여주로 내려가서 그동안 모은 자료나 정리하면서 무술인으로서의 활동을 마무리하기로 했다. 한편 생업으로 삼을 다른 일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신한승 선생을 만나게 되었다. 당시 보행보조기구를 착용하고 있었는데 그 상황에서도 무술과의 인연은 끈질기게 이어졌다. 예전부터 택견에 관심이 많았고 여주에서 충주는 그리 멀지 않았으므로 자주 찾아뵙게 되었다.

    
질문> 수벽치기 전인이 된 경위에 대해서.

▲ 수벽치기는 “젊은 사람한테 너무 큰 짐을 주는 것 같다”고 하시면서 신한승 선생이 유언으로 부탁하신 일이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새로운 무술 문파를 창시하고 싶어서 신한승 선생을 앞세웠을 것이라고 말하는데, 내가 수벽의 일을 하게 된 것은 내가 원해서가 아니다. 선생께서 돌아가신 후 신문에 ‘수벽치기 계승자는 육태안’이라는 기사가 대문짝만하게 실렸을 때 나는 수벽을 할 마음의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고 솔직히 하고 싶지 않았다. 선생이 살아계셨더라면 반납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다리도 다친 상태에서 앞으로 어떻게 해나갈지 막막하기만 했다. 혼자서 개척해나갈 자신도 없었고 무척 험난한 길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질문> 신한승 선생으로부터 전수 받은 수벽치기의 내용은?

▲수벽8세-날개세우기, 한날개내리기, 두날개내리기, 날개들기, 날개내기, 날개내리기
               날개접기, 손뼉치기

   수벽8법-수벽(掌), 손날, 반날, 줌, 고드기, 잽이, 쏘기, 찝기(찍기)

   별법: 걸음, 발질


  수벽8세는 맨손검술이라고도 하는데 검기를 형상화한 동작이다. 검 없이 검의 기운을 몸 안에 담는 수련방법이다. 어느 정도 검을 쓸 줄 아는 상태에서 그것을 수렴시켜서 연습하는 것인데, 반대로 검술을 익히기 전 기초단계로 삼을 수도 있다.

  수벽8법은 보편적 무술의 영역이다. 앞의 다섯가지(장, 손날, 반날, 줌, 고드기)는 손모양에 따라 기법을 분류한 것이고, 뒤의 세가지는 개념으로 엮은 것이다. '잽이'는 유술(柔術)을 말하며 '쏘기'는 순간적으로 힘을 발출하여 가볍고 빠르게 내쏘는 것이다. 권투선수 알리의 쨉(jab)이 쏘기의 개념에 가장 가깝다고 생각한다. 잽이를 음유(陰柔)라고 한다면 쏘기는 양강(陽剛)이다. 찝기(찍기)는 급소를 치는 점혈법인데 무협지에서처럼 사람을 통째로 마비시키는 그런 것은 아니고, 짧은 거리에서 취약점을 타격하여 상대방의 균형을 무너뜨리거나 붙잡혔을 경우 틈을 만드는 것이다.

  이 기법들은 일간스포츠 87년 7월 11일자 <수벽치기 계보 찾았다> 기사에도 명시되어 있다. 당시 취재는 육홍타 기자가 했는데, 어떤 사람은 이를 두고 문중끼리 짜고 조작한 것이 아니냐는 말까지 했다. 같은 육씨라고 말이다. 정말 갈 때까지 간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내가 밉다고 한들 기자의 명예를 훼손하는 그런 말을 함부로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한때 PC통신에서 이 문제가 불거져 나왔는데 그걸 본 육홍타 기자가 직접 토론방에 들어와 정리한 적이 있다. 취재 당시 기법명칭은 내가 써서 준 것이 아니라 육홍타 기자가 신한승 선생으로부터 직접 받아 적은 것이다. 나는 그 내용을 기사에 넣을 줄은 몰랐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다행이다. 그게 신문기사에 명시되지 않았더라면 나는 또 궁지에 몰렸을 것이다.





(87년 7월 11일 일간스포츠, <수벽치기 계보찾았다>.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다.)
  
  
  수벽치기는 크게 수벽팔세와 수벽팔법 두 영역으로 나뉜다. 수벽팔세 즉, 맨손검술은 함부로 변형을 해서는 안되는 엄격함이 서려 있지만 보편적 권법의 영역인 수벽팔법은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열려있는 공간이다. 수벽팔법은 신한승 선생으로부터 내려받은 기법체계를 중심으로 그동안 여러 스승들과의 만남을 통해 형성된 것들을 재정립한 것이다. 수벽팔법은 앞으로 더 풍성하게 발전되어야 하며 나는 지금도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사람들은 무술이라면 으례 화려한 움직임과 강력한 파괴력을 기대하기 마련이다. 방송국에서 촬영을 하거나 대중 앞에서 시범을 보일 때에는 다소 정적이고 밋밋한 수벽팔세는 생략되거나 최소로 포함되고 대신 볼거리가 될만한 수벽팔법, 그 중에서도 위력시범이 강조될 수 밖에 없었다. 사람들의 관심은 여기에 집중되었고 외부에 비춰지는 모습만을 두고 수벽치기가 육태안 개인의 창작물이라는 말이 나오게 된 것 같다. 수벽치기를 깎아내리려고 하는 사람들이 이것을 그냥 넘어갈 리가 없다.


질문> 수벽치기는 기천을 적당히 개량한 것이라는 말에 대해서.


▲ 나는 우선 그러한 생각을 하는 사람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다. 수벽에 대해서 얼마나 알며 또 기천은 얼마나 배웠는지. 그런 판단을 내리기 위해선 적어도 기천과 수벽치기 양 쪽에 대한 상당한 이해가 필요하지 않겠는가.


  깊이 수련하여 몸에 배어있는 무술적 습관은 어쩌면 평생 지워지지 않는 것이 될 수 있다. 그러한 습관을 금새 지워버리듯 없애고 다른 무술을 받아들이기는 매우 힘든 일이다. 나는 수벽을 만나기 전에 많은 무술들을 섭렵했다. 태권도, 합기도, 기천이 그 대표적인 것이다. 내가 수벽을 만나기 이전에 수련했던 무술들이 내가 수벽을 정립하는데 알게 모르게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내가 섭렵한 여러 무술을 종합해서 ‘수벽치기’라는 이름을 내걸고 조작했다는 말은 모함이다. 이것은 수벽의 등장을 꺼려하는 세력들의 음모이다.

  수벽치기는 신한승 선생으로부터 전해진 수벽8세를 기준으로 수련하는 맨손검술의 세계이다. 이전에 내가 섭렵했던 무술들과는 근본부터 다르다. 수벽치기는 본질 파악에 많은 시간과 노력이 소요되었으며 올바른 해석을 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수벽치기는 일반 무술과는 확연히 다른 독특한 세계이기 때문에 그동안 내가 알고 있었던 무술과의 비교 검토가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질문> 앞으로 계획에 관하여 한 말씀.

▲ 수벽치기에 전념하느라 다른 것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수벽치기는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결정된 일이고 운신의 폭도 좁아 자유롭지 못했다. 수벽치기를 하면서 고약한 상황을 만나 난처한 입장이 되었다. 앞으로는 나에 관한 이러저러한 소문에 휘둘리어 수벽치기를 오해하는 사람이 없었으면 좋겠다.


  수벽치기의 체계를 잡는 것이 어느 정도 되었고 이제 다음 세대로 이어져갈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이제부터 자유롭게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입장이 되었다. 앞으로는 어느 한 문파에 예속되지 않고 자유로운 입장에서 무도발전을 위하여 일할 것이다.


   참 기이한 운명을 타고 났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그 운명을 받아들이고 내가 할 수 있는 부분에서 최선을 다하려고 한다. 전통무예는 우리민족이 공유하여야 할 문화유산이다. 한 종류라도 더 찾아보아야 하고 희미한 흔적이라도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 나는
정말 힘겨운 길을 걸어왔다. 이제는 더 이상 전통무예를 찾아 헤매는 사람이 없었으면 좋겠다. 후대 사람들은 어려움 없이, 우리 무예의 자산을 향유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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