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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이야기]무술의 철학자, 대륙의 혼 원화평[퍼온글]

영화속의 무술 2004.07.21 01:54 조회 수 : 1462

무술의 철학자, 대륙의 혼

“<매트릭스> 이후 모든 것이 바뀌었다.” 원화평은 홍콩액션이 지금 같은 파워를 가지게 된 까닭을 묻는 물음에 단호하게 대답한다. 그 대답에는 <매트릭스>를 향한 찬사와 함께 자신이 안무한 액션을 뿌듯해하는 장인의 자존심이 섞여 있다. 그리고 그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기도 할 것이다. 오우삼과 서극, 임영동, 우인태가 할리우드에 나섰지만, 그중 어떤 감독도 카메라 뒤에 묻힌 한 무술감독이 했던 것처럼 동양의 정서와 영혼을 살려내진 못했다. 원화평은 세계 대부분 육지를 지배한 할리우드 액션영화의 전제 자체를 뒤집었다. <필름메이커>로부터 “영화적이고 초현실적이라는 단어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꿈의 단계라고 말해야 할” 액션을 창조했다는 찬사를 받은 무술감독의 목소리를 들었다. 새로운 세기의 액션영화는 원화평과 그 동료들이 변방에서 지켜온 홍콩 액션영화와 함께 막 숨쉬기를 시작하고 있는 중이다.



<킬 빌>에서 그를 무술감독으로 초빙한 타란티노, 2001년 <철마류>가 미국에서 개봉할 때 쿠엔틴 타란티노는 홍콩에 있던 원화평을 대신해 극장에 섰다. “나는 홍콩 쿵후영화를 매우 좋아하는데, 원화평은 그중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감독”이라고 소개를 시작한 타란티노는 “벌써 6년 전 미라맥스에 원화평을 추천했다. 이연걸과 견자단을 캐스팅하고 원화평에게 연출을 맡기라고 말했지만, 그들은 듣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매트릭스> <와호장룡>은 할리우드에 무술감독으로만 알려졌던 원화평이 스스로 연출한 영화까지 극장에서 개봉하도록 만들었다. 중력에 붙들리지 않고 허공에 선을 긋는 원화평의 액션은 언어와 문화의 장벽을 허물었고, <철마류>는 비영어권 영화로는 보기 드물게 박스오피스 6위로 데뷔했다. 한때 리뷰 뒤에 붙는 크레딧에서 무술감독이 누구인지조차 밝히지 않았던 많은 해외언론은 이제 그의 이름 앞에 명인(Master), 전설적인(Legendary) 등의 수식어를 붙이며 경의를 바치고 있다.



“나는 배우를 가리지 않는다”

어느 홍콩 영화인은 “촬영현장에서 서극과 대등하게 의견을 나눌 수 있는 무술감독은 원화평뿐이다”라고 말했다. 서극과 원화평은 <황비홍>으로 배우의 육체가 특수효과보다 경이로울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고, 중국 신화와 무협을 결정처럼 응고시킨 <촉산전>을 위해 힘을 모았던 파트너다. 감독이 무술감독에게 일방적으로 주문만 떨어뜨리는 홍콩에서, 무협을 좋아하는 여섯살 차이 동년배의 두 남자는 쿵후가 그려내는 영상 앞에 시선을 일치시켜왔다. 그러나 그 상대가 원화평이 아니었다면, 서극이 영화를 어떻게 찍어야 할지 무술감독과 의논할 까닭이 있었을까? <와호장룡>의 리안 감독마저 지루한 시행착오를 겪은 끝에 “당신 뜻대로 하세요, 마스터”라고 고개를 숙였다는 원화평은, 무술감독이 머물러야 할 영역을 지키면서도 그 좁은 마당을 훌쩍 뛰어넘어 액션을 안무하는 장인이다. 그가 토대를 다지고 구조를 쌓아올린 액션은 검게 팬 <정무문>의 독묻은 손바닥 자국처럼, 영화에 원화평이라는 이름을 또렷이 새긴다. 옛이야기를 할 때마다 버릇처럼 “삼십년도 전에...”라고 운을 떼는 원화평은 이소룡이 할리우드를 침범했던 1970년대 초반 엔드 크레딧에 자기 이름을 집어넣기 시작했다.



홍콩 최초의 무술감독이라고 일컬어지는 그의 아버지 원소전은 10남매의 맏아들이었던 원화평과 그 남동생들이 아주 어렸을 적부터 쿵후를 가르쳤고, 아이들이 십대에 접어들면서부터는 “일하는 영화현장마다 무조건” 데리고 다녔다. 스턴트맨과 엑스트라 등을 거친 원화평은 신인감독이었던 오사원의 1971년작 <풍광살수>에 액션 디렉터로 참여해 독자적인 경력에 머릿돌을 놓았다. 그는 몇년 동안 오사원과 <탕구탄> <아호강룡> <맹호하산> 등을 함께하는 틈틈이 <석파천경> 등에선 동생 원상인과 공동으로 액션을 만들기도 했다. 원화평은 “예전에 나는 내 영화가 관객과 제작자를 만족시킬 수 있을지에만 관심을 가졌다. 영화가 성공하리란 확신만 있다면, 제작자한테 내 재산 마지막 한푼까지 담보로 잡힐 마음도 먹었겠지만, 이 산업은 매우 불투명하다”라고 말했다. 그가 주머니를 탈탈 털어서라도 제작했으면 좋았을 영화가 1978년 직접 연출해 엄청난 성공을 거둔 <취권>이었다. <취권>은 원화평과 그 가족, 친구들이 사이좋게 만든 영화였다. 돈독한 파트너 오사원이 제작과 각본을 맡았고, 아버지 원소전은 젊은 황비홍에게 취권을 가르치는 사부로 출연했다. 동생 원신의와 원진위, 원화평 그 자신이 무술감독으로 팀을 짜서 베이징오페라로 단련된,



이소룡의 후계자가 되고 싶어했던 성룡에게 코미디와 쿵후가 결합된 독특한 액션을 구사하도록 했다. 골격이 예리한 이소룡보다 부담없게 생긴 성룡은 무뚝뚝한 무협영화 대신 자신에게 어울리는 장르를 찾았고, 주변 사물을 이용한 발차기로 날아오르면서 두 번째 용(龍)으로 떠올랐다. “영화는 한편 안에서도 끊임없이 변화한다. 따라서 무술감독은 캐릭터와 스토리와 장면에 맞는 액션을 생각해야 한다. 좀더 유연해질 필요가 있다”고 말하는 원화평은 배우에 따라서 다른 힘을 실은 다른 동작을 창조하곤 한다. 오우삼이 주윤발과 니콜라스 케이지를 1초당 각각 다른 프레임 수로 잡아내는 것처럼, 원화평은 성룡에겐 장르를 무시한 코믹 쿵후를, 파워있는 로렌스 피시번에겐 강한 주먹을, 아름다운 육체를 가진 캐리 앤 모스에겐 여섯달 동안 배워야했던 빠른 ‘스콜피온 킥’을 부여한다. 원화평이 “나는 배우를 가리지 않는다. 쿵후를 전혀 모르는 배우라도 훈련만 하면 액션배우가 될 수 있다”고 장담하는 데는 이런 유연성이 뒤를 받쳐주고 있는 것이다. 원화평은 <매트릭스> 촬영 시작 전 받은 척추수술 후유증 때문에 무리한 발차기를 할 수 없었던 키아누 리브스를 위해 손동작 위주지만 남들보다 몸사리는 것처럼 보이진 않는 가라테 도장장면을 지휘하기도 했다.



다른 사람의 영역엔 겸손하게, 자신의 영역엔 고집있게

원화평은 1980년대에 무술감독보다 감독으로 더 많은 영화를 찍었다. 그런 그에게 “동작을 짜는 것 외에 촬영이나 편집을 연구하는지” 물었을 때, 그는 “아니, 오직 동작만 생각한다”고 짧게 대답했다. 원화평이 서극과 함께 <황비홍>을 만들어 홍콩영화를 한 고비 끌어올릴 수 있었던 까닭은, 조화를 깨지 않는 창조력 덕분이었을 것이다. 원화평이 액션안무만을 맡은 <황비홍>은 그와 인연이 깊은 영화였다. 청조말의 혼란기, 중국인들 마음의 영웅으로 남아 있는 황비홍은 수십년에 걸쳐 영화 속에 등장해왔다. 원소전은 1960년대 <황비홍> 시리즈의 무술감독이었고, 원화평 역시 <취권>과 <철마류>의 이야기 속으로 황비홍을 데려왔다. 서극이 감독한 1991년작 <황비홍>은 이연걸이라는 걸출한 배우를 만나 어느 때보다도 당당하고 기품있는 영웅으로 태어났지만, 원화평이 정교하게 짜맞춘 액션이 없었더라면, 이연걸은 평범한 단신의 액션전문 배우에 머물렀을지도 모른다. 웬만한 2층 건물 높이에 맞먹는 사다리가 공간을 가로지르고, 벽에 기대섰다가 다시 다리처럼 아래로 떨어져 서로 교차하는 <황비홍>의 유명한 장면은 과연 원화평이 영화적 요소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가 하는 의심을 불러일으킨다.



그는 <매트릭스>도 <와호장룡>도, 다른 영화들도, 모두 감독의 요구에 맞춰갈 뿐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원화평이 들려주는 <와호장룡>의 기억은 조금 다르다. “리안 감독은 액션영화를 잘 몰랐다. 그가 찍을 수 있다고 믿는 장면은 너무 어려워서 가능한 한계 아래로 낮춰야 했다. 반면 그가 정말 스펙터클하다고 생각하면서 난감해한 장면은 사실 이 업계에선 흔한 거라고 말해줘야 할 때도 있었다.” <와호장룡>의 주연 주윤발은 “이건 리안의 영화니까 내 식대로 찍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리안 감독이 액션에서만큼은 판정패했다고 증언했다. <매트릭스>에 얽힌 일화는 원화평이 얻어낸 승리들이 강요보단 상대가 스스로 깨닫기를 기다리는 인내에 기초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매트릭스> 이전에는 할리우드에서 일해본 적이 없었던 원화평은 와이어를 당길 때 스탭들이 직접 하는 대신 기계를 사용하라는 할리우드 스탭들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촬영 도중 사고가 일어나 와이어 담당 스탭 한명이 크게 다쳤고, 와이어 작업은 다시 원화평의 방식대로 돌아갔다. 할리우드 스탭들은 기술을 추종하지만 원화평은 사람을 믿는다. 그리고 그 믿음은 차가운 기술보다 유효하다. 원화평은 언뜻 단순해 보이는 와이어 작업이 배우의 움직임과 기량에 따라 달라져야 하고,



타이밍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사람 손에 느껴지는 감각에 성패가 달려 있는 것이다. 원화평이 데리고 다니는 무술팀은 홍콩 시절부터 거느리고 다녔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적당한 교육기관이 없어서 현장을 구르며 일을 배웠다. 하지만 하는 일은 모두 다르다. 와이어에 능숙한 사람들은 배우들에게 와이어 액션을 가르치고, 쿵후를 잘하는 사람들은 쿵후 훈련을 맡는다. 무기를 잘 다루는 사람들은 무기 쓰는 법을 가르친다.” 원화평과 그의 팀은 다른 사람의 영역엔 겸손하게, 자신의 영역엔 고집있게 일한다는 원칙을 지킨다. 그것은 액션에 특수효과가 끼어들 때도 마찬가지다. <매트릭스2 리로디드>엔 네오가 100명으로 자가복제한 스미스 요원들과 싸우는 장면이 있다. 이중 진짜 사람은 단지 몇명뿐이었지만, 원화평은 완성된 장면이 어떻게 나올지 신경쓰지 않았다고 말했다. “워쇼스키 형제가 최종 결정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나에게 격투장면이 어때야 할지 이야기해줬고, 마음에 들면 그 장면을 들고 특수효과를 입히러 갔다”는 것이다. 그는 “와이어 액션이 한계에 부딪혔다고 느끼면 컴퓨터를 사용해 더 흥미롭게 보이도록 만들 수 있다. 컴퓨터와 액션이 합쳐지면 매우 흥미로운 무언가가 태어날 것”이라고 믿는 개방적인 무술감독이다.



“과거를 반복해선 안 된다”

하지만 원화평의 이런 태도는 종종 비판을 받기도 한다. 무술감독 룬셩은 “원화평이 할리우드에서 한 작업은 홍콩 시절에 못 미친다. 이전에 그는 흥미롭고 환상적인 자기만의 스타일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은 특수효과가 중심인 영화에 동양적인 풍취를 더할 뿐”이라고 말했다. 리안 역시 “<매트릭스>의 액션은 원화평의 평균 수준에 못 미친다. 그의 상상력이 특수효과에 제한을 받기 때문”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원화평을 염두에 둔 발언은 아니었지만, <영웅> <철마류>의 배우 견자단이 밝힌 포부도 원화평과 비교가 된다. 본토에서 쿵후를 배운 견자단은 와이어가 눈속임이라고 말하면서 “나는 와이어를 좋아하지 않는다. 난 진정한 무술인이기 때문이다. 만일 당신이 무술의 경지에 한도를 둔다면 그 정수를 놓치는 것이다”라고 단언했다. 원화평은 “과거를 반복해선 안 된다”는 말로 자신의 변화를 설명했다.



욕심부리지 않고, 후회하지 않도록 노력하고, 성공을 기대한 적이 없기 때문에 부담도 느끼지 않는다는 그는 많은 일을 좋은 쪽으로 해석했다. 워쇼스키 형제가 <매트릭스>를 카피하는 영화들을 싫어한 것과 달리, 원화평은 “모방의 대상이 된다는 건 어쨌든 행복한 일”이라고 답하기도 했다. 동양적인 색채를 가미할 뿐이라는 비판 역시 원화평에게 이르면 당연한 진리가 된다. “나는 어설픈 퓨전액션을 시도할 생각은 한번도 하지 않았다. <매트릭스>가 성공할 수 있었던 건 동양과 서양을 뒤섞는 대신, 동양적인 요소를 군데군데 더하기만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화평이 무조건 타협만 하는 것은 아니다. 원화평은 “내 목적은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할 수만 있다면 같은 이야기를 대사가 거의 없이 들려주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다. 검은 옷을 입은 이연걸이 표창처럼 공중을 꿰뚫는 <흑협>이나 주윤발과 장쯔이가 물결처럼 내려앉는 나뭇가지 위에서 부딪치며 수많은 상념을 주고받는 <와호장룡>, 끝을 모르고 휘어지다 뻗어가는 금속비늘 위에 수천년 신화의 무게가 실리는 <촉산전>은 그 꿈을 짐작하게 하는 표본들이다.



물론 <킬 빌>에 와서는 조금 변화된 모습을 보이기는 했지만, 그런 생각은 앞으로도 크게 달라질 것 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필름메이커>는 포스트프로덕션이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 원화평의 액션을 두고 “원화평은 비현실적인 액션을 믿을 만한 것으로 만든다”고 평했다. 이런 찬사와 영광의 한가운데 있지만, 원화평은 이 모든 것이 언젠가 사라질지도 모른다고 믿는다. 그는 “만사는 새옹지마다. 좋은 일이 있으면 나쁜 일도 있다. 홍콩 액션영화도 죽어가는 장르가 될 테고 그것이 자연의 섭리다”라고 말했다. 그렇다 해도 육십을 눈앞에 둔 원화평에겐 아직 더 가야만 할 어딘가가 있을 것 같다. <매트릭스> 시리즈의 제작자 조엘 실버는 “원화평은 워쇼스키 형제의 철학과 이야기를 액션에 녹여낸다”고 평가했다. 원화평 자신은 “난 꿈이 별로 없다”고 했지만, 조엘 실버가 말한 경지에, 꿈이 없는 사람이 다다를 수 있었을까. 원화평이 온화하게 풀어놓은 말들 속엔 성급하게 사라져선 안 될 장인의 꿈이 태극권처럼 느릿하나 힘있게 움직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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